일본 가수 우타다 히카루 (宇多田光) 최근 근황 – fisrt love

1998년 일본 가요계의 판도를 바꿀 신인이 나타납니다.그녀는 얼굴 없는 가수로 데뷔해 TV 출연 없이 라디오와 스트리트 앨범 판매만으로 바이럴해져 인지도를 높이게 됩니다.그녀는 바로 우타다 히카루, 오늘은 현재도 전성기를 맞고 있는 일본 최고의 가수 우타다 히카루에 대해 알아보고 근황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가요계를 바꾼 15세 소녀.

그녀가 데뷔한 90년대 말 J-pop은 유명 프로듀서 ‘코무로 테츠야’의 전성시대였습니다.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 카하라 토모미(香原友美), TRF 등을 프로듀싱한 ‘코무로 테츠야(小室哲也)’는 한때 오리콘 차트의 대부분을 그의 작품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그의 전성기를 끝내버린 가수가 우타다 히카루였습니다.

그녀는 90년대 말 일본에서 생소했던 R&B 발라드를 들고 나와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점차 그녀의 실력과 음악성이 소문이 나 마침내 방송 출연을 하게 됩니다.첫 방송 출연에 모두가 주목한 가운데 그녀의 등장에 모두가 놀랍니다.그 이유는 그녀가 겨우 15살 중학생이었던 것입니다.게다가 얘가 모든 앨범을 작사 작곡했어요.그녀의 등장에 프로듀서 코무로 테츠야는 “그녀가 데뷔했을 때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첫 번째 싱글 ‘Automatic/time will tell’ 이후 두 번째 싱글 ‘Movin’on without you’가 120만 장 넘게 팔렸고 99년 첫 앨범이 나왔습니다. 이 앨범은 일본 음악의 판도를 바꾸게 됩니다.첫 앨범 ‘First love’는 첫 주에만 200만 장이 판매돼 6개월 만에 840만 장을 팔아 일본 음악 최다 판매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필연적인 성공의 배경

그녀의 아버지는 음악 프로듀서, 어머니는 70년대를 풍미한 일본 국민 가수 후지 케이코였습니다.후지 케이코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그녀는 70년대 앨범 3장을 연속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당대 최고의 가수였습니다.

당연히 집안 분위기를 항상 음악 위주로 흘러갔습니다.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 스튜디오가 자신의 놀이터였습니다.또한 부모님은 그녀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고 전폭적인 음악 활동을 지원했습니다.그래서 그녀가 10살 때는 가족 밴드를 결성해서 앨범도 발매하곤 했어요.이후 부모님의 권유로 본격적인 작사, 작곡을 시작하여 13살이 될 무렵 비공식 싱글 앨범 ‘Precious’를 만들게 됩니다. 데뷔&연예계 생활

우타다 히카루는 일본에서 가수 데뷔를 위해서 14세로 뉴욕에서 도쿄에 혼자 오게 됩니다.도쿄의 한 스튜디오에서 보컬 트레이닝을 받던 중 유명 감독의 미야케 아키라 씨의 눈에 띄어 전문적인 작곡 코칭을 받게 됩니다.코칭을 받게 되고부터 3일 후 그녀는 곡을 하나 쓰고 아키라에 가져가게 됩니다.그 노래가 그 유명한<Never let go>였지요.아키라는 그녀의 엄청난 재능에 충격을 받아 우타다 히카루의 첫 앨범”First love”에 그녀가 만든 시위 관련 자료를 그대로 넣습니다.그녀의 첫 앨범”First love”는 밀리언 셀러를 달성하고 16세로 음반 판매만 이미 90억을 넘는 수입을 올리며 2005년 그녀의 앨범 추정 소득에만 600억을 넘었습니다.

이렇게 일본 연예계 영앤리치의 표본을 보여준 그녀였지만 의외로 아주 소박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평소 방송 출연에 본인이 좋아하는 후드티에 청바지를 즐겨입기는 했고, 다른 연예인들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스텝으로 오인되기도 했습니다.

이것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한국 SS501이 일본 활동 중 그녀가 스태프인 줄 알고 의자 선반의 음료를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음료와 의자를 전달한 일화가 있었습니다. 오랜 침체기의 시작

이것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한국 SS501이 일본 활동 중 그녀가 스태프인 줄 알고 의자 선반의 음료를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음료와 의자를 전달한 일화가 있었습니다. 오랜 침체기의 시작

그녀는 일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2002년 미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계속된 컨디션 불량으로 이상을 느껴 검진을 받은 결과 난소에 양성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게 됩니다.그리고 호르몬 치료로 인해 컨디션 기복이 심해져 라이브를 할 수 없게 되면 미국 진출 계획뿐만 아니라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활동 중단에 들어가게 됩니다.그러던 중 그녀는 19세의 젊은 나이에 15세 연상의 사진가 ‘키리타니 카즈토시’와의 결혼을 발표합니다. 앨범 재킷 촬영을 하면서 친해진 두 사람은 5년 후 2007년 이혼합니다.건강과 결혼생활로 미뤄왔던 미국 진출은 이혼 후 다시 도전하게 되지만 최종 기록 빌보트 차트 160위를 기록하며 사실상 실패하게 됩니다.난해한 앨범과 당시 미국 시장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은 실력 있는 그녀로도 깨기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BTS가 대단하네요.이후 그녀의 침체기는 계속됩니다만.오래 전부터 정신병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후지 케이코는 미국 공항에서 약물 성분이 검출된 대량의 지폐를 들고 입국하다 적발되어 모두 압류됩니다.당시 압류된 금액은 약 5억원으로 조사 결과 약물과 관계 없는 돈이다, 카지노를 하기 위한 돈이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그러나 이 사건 이후 그녀의 정신병이 심해지면서 횡설수설로 불안이 극에 달하는 이상 행동을 계속 보는습니다.이 시기, 우타다 히카루와 그녀의 어머니의 사이는 형편없어요.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후부터 정신병이 시작되었대요.그래서 그녀의 부모는 6번이나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불안정한 가정 생활을 보낸 경험이 있습니다.이런 가정 사정 때문인지 가수 생활에 집중 못하고 성대 결절과 우울증이 겹치면서 그녀는 2011년 모든 활동을 중지합니다.하지만 그녀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어요.활동을 중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사망합니다.어머니의 사망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멘탈마저도 붕괴시켰습니다.당시 그녀의 어머니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언론 취재진이 몰려들었지만 영구차를 세우면서까지 그녀를 취재하는 모습이 노출됐는데,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 팬들을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그녀의 어머니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하고 많은 추측이 난무하자 우타다 히카루는 성명문을 통해 “어머니가 오랜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며 생전 마지막 자신이 어머니에게 엄격하게 했던 부분은 너무 슬프고 후회스럽다”고 밝혔습니다. 근황활동 중단을 선언한 지 3년 후, 그녀는 8살 연하의 바텐더와 재혼을 발표합니다.결혼 당시 팬들은 그녀의 불안정한 감정 상태와 상대방과의 소득 격차가 커질 것을 우려하며 트위터에 댓글을 달았습니다.이에 그녀는 자신의 인생 파트너를 선택하는 데 경제력은 보지 않는다고 트윗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생활도 2년 만에 끝납니다.이후 2016년에 ‘꽃다발을 너에게’라는 곡으로 가수 활동을 재개하지만 기존 우타다 히카루의 스타일과는 많이 다른 곡으로 팬들의 실망이 컸습니다. 물론 앨범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대성공 이후 계속된 불운과 실패 때문일까요?그녀는 얼마 전 갑자기 비바이너리를 선언합니다.논바이너리란 자신의 성별을 남성, 여성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오랜 예능생활에서 언론의 집중으로 답답함을 느낀 그녀가 정말 자유를 추구하려는 것 같아 팬으로서 응원해주고 싶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인 음악으로 대중 앞에 다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